[한글필사] 2025.01.09.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렴
[파초] - 이육사
항상 앓는 나의 숨결이 오늘은
해월처럼 게을러 은빛 물껼에 뜨나니
파초 너의 푸른 옷깃을 들어
이닷 타는 입술을 추겨주렴
그 옛적 사라센의 마지막 날엔
기약없이 흩어진 두날 넋이었어라
젊은 여인들의 잡아 못논 소매끝엔
고은 소금조차 아즉 꿈을 짜는데
먼 성좌와 새로운 꽃들을 볼 때마다
잊었던 계절을 몇 번 눈우에 그렸느뇨
차라리 천년 뒤 이 가을밤 나와 함께
비ㅅ소리는 얼마나 긴가 재어보자
그리고 새벽하늘 어데 무지개 서면
무지개 밟고 다시 끝없이 헤여지세
[나의 뮤-즈] - 이육사
아주 헐벗은 나의 뮤-즈는
한번도 기야 싶은 날이 없어
사뭇 밤만을 왕자처럼 누려 왔소
아무것도 없는 주제였만도
모든 것이 제것인 듯 뻐틔는 멋이야
그냥 인드라의 영토를 날라도 단인다오
고향은 어데라 물어도 말은 않지만
처음은 정녕 북해안 매운 바람속에 자라
대곤을 타고 단였단 것이 일생의 자랑이죠
계집을 사랑커늘 수염이 너무 주체스럽다도
취하면 행랑 뒤ㅅ골목을 돌아서 단이며
복보다 크고 흰귀를 자조 망토로 가리오
그러나 나와는 몇 천 겁 동안이나
바루 비취가 녹아 나는 듯한 돌샘ㅅ가에
향연이 벌어지면 부르는 노래란 목청이 외골수요
밤도 시진하고 닭소래 들릴 때면
그만 그는 별 계단을 성큼성큼 올러가고
나는 초ㅅ불도 꺼져 백합꽃 밭에 옷깃이 젖도록 잤소
[일식] - 이육사
쟁반에 먹물을 담아 비쳐본 어린날
불개는 그만 하나밖에 없는 내 날을 먹었다
날과 땅이 한줄우에 돈다는 고 순간만이라도
차라리 헛말이기를 밤마다 정녕 빌어도 보았다.
마침내 가슴은 동굴보다 어두워 설래인고녀
다만 한봉오리 피려는 장미 벌레가 좀치렸다
그래서 더 예쁘고 진정 덧없지 아니하냐
또 어데 다른 하날을 얻어
이슬 젖은 별빛에 가꾸련다
[아미] - 구름의 백작부인 - 이육사
향수에 철나면 눈섶이 기난이요
바다랑 바람이랑 그 사이 태여났고
나라마다 어진 풍속 자랐겠죠
짓푸른 깁장을 나서면 그 몸매
하이얀 깃옷은 휘둘러 눈부시고
정녕 왈츠라도 추실란가봐요
해ㅅ살같이 펼쳐진 부채는 감춰도
도톰한 손결 교소를 가루어서
공주의 홀보다 깨끗이 떨리요
언제나 모듬에 지쳐서 돌아오면
꽃다발 향기조차 기억만 새로워라
찬젓 때리는 소리에다 옷끈을 흘려보내고
초ㅅ불처럼 타오르는 가슴속 사념은
진정 누구를 애끼시는 속죄라오
발아래 가득히 황혼이 나우리치오
달빛은 서늘한 원주 아래 듭시면
장미쪄 이고 장미쪄 흩으시고
아련히 가시는 곳 그 어딘가 보이오
[황혼] - 이육사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우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 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ㅅ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 - 푸른 커텐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긴 시내ㅅ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줄 모르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