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필사

데미안 24~28p

Sungyeon Kim 2025. 2. 13. 18:29

나는 그 논리를 이해했다. 그러나 2마르크라니! 2마르크란 나한테는 10마르크, 100마르크, 1000마르크나 마찬가지로 도달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나는 돈이 없었다. 어머니 옆에 높아둔 저금통이 있었다. 거기에는 아저씨가 오신다든지 할 때 받은 몇 개의 10페니히 또는 5페니히짜리 동전이 들어 있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나이에는 아직 용돈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난 아무것도 없어." 내가 슬프게 말했다. "난 돈이 없어. 하지만 그것 말고는 뭐든 줄게. 내게는 인디언 책이랑 병정들이 있고, 나침반도 하나 있어. 그걸 가져다줄게."

크로머는 다만 뻔뻔하고 심술궂게 입을 움칫하며 바닥에 침을 탁 뱉을 뿐이었다.

"헛소리 집어치워!" 그가 명령하듯 말했다. "네 고물 잡동사니들은 너나 가져. 나침반이라고! 날 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마. 잘 들어. 돈을 가져와!"

"하지만 난 돈이 없는걸, 나는 돈을 받아 본 적이 없어. 어떻게 할 길이 없어!"

"내일 나한테 2마르크를 가져오는 거야. 학교가 끝난 뒤 저 아래 시장에서 기다릴게. 그럼 끝이야. 만약 돈을 안 가져오면 알지!"

"알겠어. 하지만 대체 어디서 돈을 가져오란 말이야? 하느님 맙소사. 난 돈이 없는데."

"너네 집에는 돈이 충분히 있잖아. 가져오고 안 가져오고는 네 일이지. 그럼 내일 학교 끝나고다. 말해 두지만,  만약 안 가져오면..." 그 애는 무서운 눈길로 내 눈을 쏘아보고, 또다시 침을 뱉고는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나는 계단을 올라갈 수가 없었다. 나의 인생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나는 달아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거나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러면 어떨지는 똑똑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어둠 속 계단 맨 아래 칸에 앉았다. 한껏 웅크리고 앉아 불행에 몸을 내맡겼다. 장작을 가지러 광주리를 들고 내려오던 리나가 내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리나에게 위에 가서는 아무 말도 말라고 부탁하고 올라갔다. 유리문 옆의 옷걸이에는 아버지의 모자가 걸려 있었다. 어머니의 양산도 걸려 있었다. 이 모든 물건으로부터 왈칵 고향과 애정이 나에게로 밀려왔다. 나의 마음은 뭉클하게 그것들을 반겼다. 애원하고 감사하며, 탕아가 고향의 옛 방을 보고 냄새 맡으며 그러듯이.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제 내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밝은 세계였으며 나는 깊이 죄지은 채 낯선 홍수에 잠겨 있었다. 모험과 죄악에 얽혀 들어 적에게 위협받고 있었다. 위험, 불안,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와 양산, 오래된 질 좋은 사암 바닥, 마루 장식장 위에 걸린 커다란 그림 그리고 그 안쪽 거실에서 들려오는 누나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사랑스럽고 다정하고 귀했다. 그러나 더 이상 위로가 아니었으며 확실한 자산도 아니었다. 온통 비난이었다. 그 모든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고 나는 그러한 명랑함과 고요함에 끼어들 수 없었다. 나는 내 구두에 더러움을 묻혀 왔다. 발깔개에 문질러 닦을 수 없는 더러움이었다. 고향의 세계는 알지 못하는 그림자를 끌고 왔던 것이다.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비밀과 두려움을 가졌던가.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내가 오늘 이 공간으로 끌고 온 것에 비하면 놀이이고 장난이었다. 운명이 뒤쫓아 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알아서는 안 되는 손들이, 그 앞에서는 어머니도 나를 보호할 수 없는 손들이 나에게로 뻗쳐오고 있었다. 이제 내 범행이 절도였든 거짓말이었든(나는 하느님과 목숨을 걸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나의 죄악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었다. 나의 죄악은 내가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 자체였다. 나는 왜 함께 갔던가? 나는 왜 일찍이 아버지의 말보다 크로머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던가? 나는 왜 저 도둑질 이야기를 지어내고 영웅적 행위라도 되는 양 범행을 뽐냈을까? 이제 악마가 내 손을 잡았다. 이제 적이 나를 뒤쫓고 있었다.

 

한순간 나는 내일에 대한 공포는 더 이상 느껴지 않고 무엇보다도 나의 길이 이제 점점 더 비탈로,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무서운 확신을 느꼈다. 나는 똑똑하게 감지했다. 나의 잘못에 이제 틀림없이 새로운 잘못들이 뒤이어지리라는 것, 누이들 곁에 내가 나타나고 부모님에게 인사하고 키스하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 나만이 아는 운명과 비밀 한 가지를 지니게 되리라는 것을.

 

아버지의 모자를 보자 한순간 신뢰와 희망이 내 마음속에서 번쩍 떠올랐다. 아버지에게 모든 이야기를 하리라. 아버지의 판결과 아버지의 처벌을 받아들이고 아버지를 내 비밀의 공유자이자 구원자로 만들리라. 그것은 내가 자주 감내해 냈던 참회 한 번에 불과하리라. 힘들고 가혹한 시간, 힘들고 후회에 찬 용서를 구하는 것에 불과하리라.

 

이런 생각은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던가? 얼마나 아름답게 유혹했던가! 그러나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내가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내가 지금 하나의 비밀을, 하나의 죄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나 혼자 스스로 삼켜 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나는 바로 지금 갈림길에 서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이 시각부터 영원히 나쁜 것에 소속되고, 나쁜 사람들과 비밀을 공유하고, 그들에게 종속되고, 그들에게 복종하고, 분명 그들 같은 사람이 될지도 몰랐다. 나는 잠시 어른 행세를, 영웅의 연기를 했더랬다. 이제 그 결과를 감당해야 했다.

 

내가 방으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가 내 젖은 구두만 본 것이 나에게는 다행이었다. 그것이 관심을 돌려 아버지는 더 나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정도 비난은 견딜 만했다. 그 비난을 나는 남몰래 다른 것과 연관시켰다. 그때 마음속에서 이상하게도 새로운 느낌이 불꽃처럼 번득였다. 뽑히지 않는 미늘이 가득 박힌 듯한 날카롭고 불길한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아버지보다 우월하다고 느꼈다! 한순간 아버지의 무지에 대해 약간의 경멸을 느꼈던 것이다. 젖은 구두에 대한 비난이 내게는 소소해 보였다. '아버지가 아신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는데, 나 자신이 살인죄를 고백해야 되는 판에 조그만 빵 하나를 훔친 죄로 심문받는 범죄자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은 추악하고도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강렬하고 몹시 매력적이었다. 그 느낌은 그 어떤 다른 생각보다도 더 단단하게 내 비밀과 죄에 나를 결박했다. 어쩌면 지금쯤 그 크로머 녀석이 벌써 경찰한테 가서 내 이름을 댔겠지. 천둥 번개가 이제 내 머리 위로 몰려오겠지.

 

여기까지 이야기한 이 모든 체험에서는 이 순간이 중요하다.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내 유년 생활을 떠받치고 있던,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되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우리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은 아무도 보지 못한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균열은 다시 늘어난다. 그것들은 치료되고 잊히지만 가장 비밀스러운 방 안에서 살아 있으며 계속 피 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