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필사

데미안 34~37p

Sungyeon Kim 2025. 2. 25. 11:58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갑자기 다시 들린다면 오늘일지라도 나는 놀랄 것이다. 그때부터 자주 그 소리를 들었으며 지금도 그 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 같다. 나를 예속시킨, 이제 나의 운명이 되어 버린 이 휘파람 소리가 뚫고 들어가지 않는 장소도, 놀이도, 일도, 생각도 없었다. 단풍이 곱던 어느 온화한 가을날 나는 내가 아주 좋아한 우리 집 작은 화단에 있곤 했다. 특별한 충동이 나로 하여금 어린 시절 소년들의 놀이를 다시해 보게 했다. 나는 얼마만큼은 나보다 어린, 아직 선하고 자유롭고 죄 없고 안정감 있는 소년 역을 했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로, 늘 예상하고 있음에도 늘 놀라게 하는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어딘가로부터 울려 와 줄을 탁 끊고 상상들을 짓부쉈다. 그러면 나는 가야 했다. 나쁘고 추한 곳들로 나의 고문자를 따라가야 했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돈 때문에 경고를 받아야 했다. 그 모든 것이 불과 몇 주일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여러 해처럼, 영원처럼 느껴졌다. 내게 돈이 있는 적은 드물었다. 기껏해야 5페니히짜리 하나 혹은 10페니히짜리 하나가 있었다. 리나가 장바구니를 놔두면 부엌 식탁에서 훔친 것이었다. 번번이 나는 크로머로부터 욕을 먹었다. 내게 경멸이 퍼부어졌다. 그를 기만하고 그의 당당한 권리를 유보하려 한 것이 나였고, 그의 몫을 가로챈 것이 나였고, 그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 나였다. 괴로움이 그렇게 심장 가까이 치솟은 적은 살면서 거의 없었다. 더 큰 절망, 더 큰 예속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저금통은 장난감 돈으로 채워 다시 제자리에 놓아두었는데 아무도 그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이든 발각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자주 크로머의 거친 휘파람 소리 이상으로 어머니를 무서워했다. 어머니가 가만히 내게로 다가설 때면 저금통에 대해서 물어보기 위해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러 번 돈을 구하지 못한 채 내 악마에게 갔기 때문에 그는 나를 다른 식으로 괴롭히고 이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위해 일해야만 했다. 그 애는 자기 아버지 심부름을 해야했는데 그 심부름을 그 애 대신 내가 해야 했다. 혹은 그 애는 나에게 무언가 힘든 것을 시켰다. 십 분 동안 외발뛰기를 하게 한다든지 지나가는 사람의 재킷에 종이쪽지를 붙이게 한다든지. 이 괴로움을 여러 날 밤 꿈속에서도 계속되어 나는 악몽의 땀에 흠뻑 젖어 누워 있곤 했다.

 

한동안 아팠다. 자주 토하고 쉽게 오한이 났으며, 밤에는 땀과 열에 젖어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느꼈는지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것이 나를 괴롭혔다. 어머니의 관심에 신뢰로 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저녁에 내가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때 어머니가 초콜릿 하나를 가져왔다. 하루를 착하게 보내면 저녁에 잘 자라고 상으로 그런 위로의 주전부리를 받곤 하던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는 일이었다. 이제 어머니가 거기 서서 나에게 그 초콜릿 조각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어찌나 괴로운지 다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물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간신히 "아니요! 아니요! 아무것도 먹지 않을래요!"라고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어머니는 초콜릿을 침대 머리 탁자에 놓고 갔다. 다음 날 어머니가 그 일에 대해 캐물으려 했을 때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한번은 의사를 데려왔다. 의사는 나를 진찰하고 아침에 차가운 물로 몸을 씻도록 처방을 내렸다.

 

그 시절 내 상태는 일종의 착란이었다. 우리 집안의 정돈된 평화 한가운데서 나는 소심하게, 그리고 고통받으며 유령처럼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관여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자신을 잊는 일은 드물었다. 자주 흥분하여 해명을 요구하는 아버지에게는 마음을 닫고 냉정히 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