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한강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학 - 황순원
"얘, 우리 학 사냥이나 한번 하구 가자."
성삼이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덕재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내 이걸루 올가밀 만들어놀게 너 학을 몰아오너라."
포승줄을 풀어 쥐더니, 어느새 성삼이는 잡풀새로 기는 걸음을 쳤다.
대번 덕재의 얼굴에서 핏기가 걷혔다.
좀 전에, 너는 총살감이라던 말이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성삼이가 기어가는 쪽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리라.
저만치서 성삼이가 훽 고개를 돌렸다.
"어이, 왜 멍추같이 게 섰는 게야? 어서 학이나 몰아오너라!"
그제서야 덕재도 무엇을 깨달은 듯 잡풀 새를 기기 시작했다.
때마침 단정학 두세 마리가 높푸른 가을하늘에 큰 날개를 펴고 유유히 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