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무리 회복탄력성이 뛰어난 사람이어도 힘든 게 최소 하루는 가는 편이다. 그래서 이날은 아침부터 꽤 힘들었다. 잠이 없는 편이라 아침에 일찍 깼음에도 불구하고 여행 와서 처음으로 밖에 나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열심히 화장하고 나왔다. 왜냐하면 지금 밖에 나오기를 포기해 버리면 앞으로도 계속 못 나오게 될까 봐.
교통버스를 타지 않고 정처 없이 계속 걸었다. 걷다가 울기도 했다. 계속 생각 정리를 했다. 생각 정리는 빠르게 끝이 났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방향도 바로 찾아냈다. 하지만 내 감정의 속도가 따라오지를 못했다. 방향은 알지만 에너지가 부족했다. 누군가 지금 공허하게 비어있는 내 손을 덥석 낚아채서 그냥 어디로든 나를 끌고 달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겠지.. 하며 바로 포기했는데 이날 저녁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다.
우선 저녁이 되기 전 목적지 없이 걷다가 달달한 것을 먹기 위해 한 바에 들어갔다
1.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먹는 츄러스 + 핫 쵸코
스페인에서 먹는 두 번째 츄러스였는데 여기는 진짜 진짜 진짜 맛집이었다!! 츄러스가 특히 겉은 엄청 바삭하면서 속은 촉촉하고 쫄깃해서 진짜 너무너무 맛있었고 핫 쵸코는 금세 바닥을 비웠다.
또 나와서 목적 없이 걷는데 발목이 아파 더 이상 못 걷겠어서 광장 계단에 앉았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휴대폰을 하며 시간을 죽이는데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2. 사진 찍어주실래요?
하고 다가온 스페인 남학생은 나보다 2살 위인 오빠였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얘기를 나누다 친해지게 됐는데 성격이 엄청 장난기 가득한 enfp 그 자체였다. 그냥 똥꼬 발랄. 사실 좀 기 빨리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덕분에 맘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며 위로가 되어주었고 광장에서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춤도 췄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고 달리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 친구가 내가 회복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요인은 아니다. 회복은 나 스스로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친구가 나에게 힘을 주었다. 비어있던 내 손을 붙잡고 앞으로 이끌며 달려줬다.
누군가는 어떻게 그런 일 뒤에 바로 그렇게 웃을 수 있냐 할 수도 있겠다. 정말 차갑다 사이코패스 아니냐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나도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웃음의 의미가 다르다. 모든 걸 잊고 살아가겠다는 의미의 웃음이 아니다. 모든 걸 껴안고 살아가면서 웃는 것이다. 내가 껴안고 살아갈 기억들을 절망으로 칠해버릴 수는 없으니까. 이제는 할아버지의 모든 절망들까지 내가 껴안고 살아갈 건데 나는 그 절망들을 행복으로 바꿔드리고 싶다. 할아버지께 절망 속 희망을 보여드리고 싶다.
할아버지와 관련해서 이 세상에 남은 건 기억뿐인데, 어느 누가 울음뿐인 기억으로 추억되길 바랄까? 평생 예쁘게 웃으며 기억해드리고 싶고, 그렇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