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렇지 않을 거야. 난 조선에서 태어난 건 맞지만, 내 조국은 미국이야. 조선은 단 한 번도 날 가져 본 적이 없거든.
2. 검은 새 한 마리가, 온 하늘을 망칠 수도 있구나 싶어서 봅니다.
3. 땅을 보고 살거라. 하늘은 멀다. 종놈 눈길이 멀면, 명이 짧은 법이다.
4. 죽여라. 재산이 축나는 건 아까우나, 종놈들에게 좋은 본을 보이니 손해는 아닐 것이다.
5. 적국은 참패의 와중에도 물러서지 않고 결사 항전 중이다. 패배가 빤히 보이는 상황에서 단 한 명의 탈영병도 없다. 아군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아붙임에도 불구하고 적군은 장군의 깃발 수자기 아래, 일어서고 또 일어선다. 창과 칼이 부러진 자는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려 저항한다. 이토록 처참하고, 무섭도록 구슬픈 전투는 처음이다.
6.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는 중이었다.
7. 걱정 마십시오. 스승님이 뭐라시던 안 물을 것입니다. 멧돼지랑 치정싸움을 하셨대도 그런가보다 할 것입니다. 죽지나 마십시오. 그러다 어느 날엔가 너도 하겠느냐 하시면 네, 하겠습니다. 할 것입니다. 한 나라의 황후가 시해당했습니다. 나랏님은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을 쳐 이 나라, 저 나라 황제에게 글로 손을 벌립니다. 그 덕에 서양대국들이 줄지어 조선에 간섭합니다. 글은... 힘이 없습니다. 저는 총포로 할 것입니다.
8. 어느 쪽으로 가시오? 그건 왜 묻소? 그쪽으로 걸을까 하여. 사방에는 낭인이고, 우린 서로 뭔가 들킨 듯하니.
9. 희귀한 의복, 존대이나 불손한 말투. 무엇보다, 살피나 여전히 알아보지 못하는 눈빛. 귀하는 내가 누군지 모르지 않소. 조선에선, 그 어떤 사내도 감히 나를 노상에 이리 세워 놓을 수는 없거든.
10. 동지였으면 서둘러 비켰어야 하고, 적이었으면 더 서둘러 비켰어야 할 터인데. 같은 쪽으로 걷겠다라... 대담한 자인가, 대책이 없는 자인가.
11. 표적이 같다 하여, 동지인 것은 아니다. 설사 오늘 동지라 하여, 내일도 동지란 법은 없다. 그러니 아무도 믿지 마라. 나 또한 포함이다.
12. 그깟 잔이야 다시 사면 그만. 나는 네가 더 귀하단다. 그러니 앞으로 어느 누구든 너를 해하려 하면, 울기보단 물기를 택하렴.
13. 성현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요. 그 판에서 누가 호구인지 모르겄으면 니가 바로 그 호구다.
14. 조선에는 말이다. 평민에게조차 말을 걸려면 바닥에 꿇어 엎드려 해야하고 그마저도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 입을 뗄 수도 없는 그런 자들이 있다. 조선에선 그들을 백정이라한다. 백정인 사내들은 칼을 들었으나 누구도 밸 수 없으니 날마다 지옥이었다. 조선의 어미들은 자식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살해당하거나 그도 아니면 스스로 버려진다.
15. 신문에서 작금을 낭만의 시대라 하더이다. 그럴지도. 개화한 이들이 즐긴다는 가배, 불란서 양장, 각국의 박래품들. 나 역시 다르지 않소. 단지 나의 낭만은 독일제 총구 안에 있을뿐이오. 혹시 아오? 내가 그날 밤 귀하에게 들킨 게 내 낭만이었을지.
16. 총 쏘는 것보다 더 어렵고, 그보다 더 위험하고, 그보다 더 뜨거워야 하오.
17. 나는 그의 이름조차 읽을 수 없다. 동지인 줄 알았으나, 그 모든 순간 이방인이었던 그는... 적인가. 아군인가.
18. 새드엔딩은 언제나 오래 남는 법이니까요. 새.. 그것이 무엇이건데 오래 남소. 슬픈 끝맺음이지요.
19. 내가 어떤 여인을 꽉 물지도 모른다는 뜻이란다.
20. 조선 땅을 다시 밟는 순간부터, 매일 궁금했어. 내 부모를 때려죽인 그 양반님네들, 잘 살고 있을까. 그럼... 복수라는 걸 한 번 해볼까.
21. 가면, 죽일 거니까. 아무도 모르게, 나만 알게. 이 위태한 조선에서 가능한 일이지.
22. 바로 그게 문제야. 사내 손에 든 게 고작 꽃이라. 그게 내가 이 정혼을 깨려는 이유야.
23. 다음에 태어나면 저리 살련다. 나는? 너는 이런 집에 살아라. 엄마가 거기 마당에 필게.
24. 정말 죄송합니다, 나리. 다 제 탓입니다. 제가 약해서 나리가 도와주신 건데. 그건 네가 약해서가 아니라 조선이 약해서야. 미국은 강대국이야. 일본에 지지 않아. 네 조국은 널 지키지 않았지만, 내 조국은 날 지킬 거거든.
25. 허면 왜 온 것이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고 그 후에는 방관이었고, 지금은 수습이오. 무슨 말이오. 정확히 설명하시오. 정확히라.. 조선으로 오면서 생각했소. 조선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내가 뭔가를 하게 되면 그건 조선을 망하게 하는 쪽으로 걸을 테니까. 이미 그리 하였소. 고작 그리 한 거요. 귀하의 말대로라면 나는 이미 그때 잡혀갔어야 맞소. 그래서 온 거요. 그랬어야 했는데 호기심이 생겼소. 조선이 변한 것인지, 내가 본 저 여인이 이상한 것인지. 잡아넣지 않는 걸로 방관했고, 총을 찾지 않는 것으로 편들었소. 지금 그걸 수습 중이고. 당분간은 애기씨로만 지내시오. 여기 출입도 삼가고. 오늘은 나 혼자 왔지만 다음은 미군들이 들이닥칠 거요. 답이 되었소?
26. 꼴은 이래도, 오백 년을 이어져 온 나라요. 그 오백 년 동안 호란, 왜란 많이도 겪었소.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지켜내지 않았겠소. 그런 조선이 평화롭게 찢어발겨지고 있소. 처음엔 청이, 다음에 아라사가, 지금은 일본이, 이제 미국 군대까지 들어왔소. 나라꼴이 이런데 누군가는 싸워야 되지 않겠소? 그게 왜 당신인지 묻는거요. 왜 나면 안되는거요. 혹 나를 걱정하는 거면... 내 걱정을 하는 거요.
27. 겨우 그 한 번의 순간 때문에. 백번을 돌아서도 이 길 하나뿐입니다, 애기씨.
28. 모르겠소. 복수의 시작이었는지, 질투의 끝자락이었는지.
29. 구해야 하오. 어느 날엔가, 저 여인이 내가 될 수도 있으니까.
30. 그래서 나 개인 경호원이 필요해. 더는 안 뺏겨. 뭘 뺏겼는데? 내 엄마, 내 청춘, 내... 이름.
31. 누구나 제 손톱 밑에 가시가 제일 아플 수 있어. 근데 심장이 뜯겨나가본 사람 앞에서 아프단 소리는 말아야지. 그건 부끄러움의 문제거든.
32. 듣고 잊어라. 그들은 그거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겠지만, 다행히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서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33. 무얼 그리 보십니까, 나으리? 내가 하늘인지 검은새인지 모르겠어서.
34. 검은 새 한 마리가 온 하늘을 망칠 수도 있다니, 그 자체로도 명문장이 아닌가. 어찌 컸을꼬...
35. 나도 그렇소.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양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면, 우린 얼굴도 이름도 없이 오직 의병이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꼭 필요하오. 할아버님껜 잔인하나,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하오. 불꽃으로. 죽는 것은 두려우나 난 그리 선택했소.
36. 조선은 내 부모를 죽인 나라였고, 내가 도망쳐 온 나라였소. 그래서 모질게 조선을 밟고 조선을 건너, 내 조국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소. 그러다 한 여인을 만났고 자주 흔들렸소. 내 긴 얘기 끝에, 그런 표정일 줄 알았으면서도... 알고도 마음은 아프오.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
37. 내가 이런 순간에만 보는 것인가, 자네가 이런 순간으로만 사는 것인가.
38. 다시 조선으로 걸으며, 저는 기대라는 걸 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달라졌다는 기대. 조선이 달라졌으리라는 기대. 하여 이 땅에서 만난 한 여인의 곁에 서서, 나란히 걷고 싶다는 기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말입니다. 허나 저는 아직도, 그 작은 상자 속을 벗어나지 못한 듯 싶습니다. 제 긴 이야기 끝에, 그 여인의 표정이 그럴 것임을 알았음에도, 그 솔직한 진심에 전 다시 조선을 달려 달아납니다. 조선 밖에로 말입니다. 요셉. 못 뵙고 떠날 것 같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39. 난 귀하가 이 총과 함께 계속 나아가서 어딘가에 가 닿기를 바라오. 그곳이 어디든, 그 길 끝에 누구와 함께든.
40. 나는 투사로 살고자 했소. 할아버님을 속이고 큰어머님을 걱정시키고, 식솔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면서도 나는 옳은 쪽으로 걷고 있으니 괜찮다, 스스로를 다독였소. 헌데 귀하의 그 긴 이야기 끝에 내 품었던 세상이 다 무너졌소. 귀하를 만나면서 나는 단 한 번도 귀하의 신분을 염두에 두지 않았소. 돌이켜보니 막연히 난 귀하도 양반일 거라 생각했던 거요. 난 내가 다른 양반들과 조금은 다를 줄 알았소. 헌데 아니었소. 내가 품었던 대의는 모순이었고, 난 여직 가마 안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일 뿐이었소. 하여, 부탁이니 부디 상처 받지 마시오.
41. 그댄 이미 나아가고 있소. 나아가던 중에, 한 번 덜컹인 거요. 그대는 계속 나아가시오. 난 한 걸음 물러나니. 그대가 높이 있어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선택해도 됐을 텐데. 무시를 선택해도 됐을 텐데. 이리 울고 있으니 물러나는 거요. 이 세상엔 분명 차이는 존재하오. 힘의 차이, 견해 차이, 신분의 차이. 그건 그대 잘못이 아니오. 물론 나의 잘못도 아니고.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진 것 뿐이오. 그대의 조선에는 행랑 어르신도 함안댁도 살고 있소. 추노꾼도, 도공도, 역관도, 심부름 소년도 살고 있소. 그러니 투사로 사시오. 물론 애기씨로도 살아야 하오. 영리하고 안전한 선택이오. 부디 살아남으시오. 오래오래 살아 남아서, 당신의 조선을 지키시오.
42. 헌데 멈추었고, 걸음을 멈춘 덕분에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를 만났던 모든 순간을. 그의 선택들과 나의 선택들을. 그의 선택들은 늘 조용했고 무거웠고, 이기적으로 보였고 차갑게도 보였는데 그의 걸음은 언제나 옳은 쪽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졌던 모든 마음들이 후회되지 않았습니다. 전 이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를 만나기 전으로. 그러니 놓치는 것이 맞습니다. 놓치지 않으면 전, 아주 많은 것을 걸게 될 것 같습니다.
43. 그래도 되는 거면 미리 고했어야지. 그자의 손에 한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고, 또 다른 이는 목숨을 걸었고, 부모를 잃은 한 아이는 원수를 지척에 두고도 죽을 힘을 다해 물러나니. 부디 이 분노보다 나은 선택을 하길 바라네.
44. 봄을 핑계 삼아 안부를 묻소. 나는 잘 있소. 귀하는 잘 있으신지요.
45. 나는 이리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봄, 꽃, 달. 일본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난 날마다 죽소. 오늘의 나의 사인은... 화사요.
46. 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 푸른 옥이 흐르는 듯 흘러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를 매어두었지요.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이 부끄러웠답니다.
47. 애기씨는 왜 자꾸 그런 선택들을 하십니까. 정혼을 깨고 흠이 잡히고 총을 들어 기어이 표적이 되는, 그런 위험한 선택들 말입니다. 허니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학당에도 가지 마십시오. 서양말같은 거 배우지 마십시오. 날아오르지 마십시오. 세상에 어떤 질문도 하지 마십시오. 이런 주제 넘은 자를 보았나. 난 내 선택 그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아. 자네를 살린 것까지, 자네의 총에 맞은 것까지. 어쩔 텐가? 내 비밀 한 자락 쥐고 있다고 뭐라도 된 듯 싶어? 아니요. 아직은요. 지금부터 애기씨의 무언가가 되볼까 합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세상 모두가 적이 되어도 상관 없겠다 싶어졌거든요. 그게 애기씨여도 말입니다.
48. 내 선의를 베고 걸음을 베고, 기어이 이런 수치를 주는구나. 해서 아프십니까? 그때 그냥 저를 죽게 두지 그러셨습니까. 그때 저를 살리시는 바람에 희망같은 게 생겼지 뭡니까. 그 희망이 지금 애기씨의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허니 애기씨 잘못입니다. 네놈은 내가 우습구나. 다시 그 순간이 온다고 해도 나는 네놈을 살릴 것이다. 허나 다시 내 눈에 띄면 그땐 네놈을 죽일 것이다. 감히 내 염려 따위 하지 마라. 네놈은 그저 날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으로만 보면 된다.
49. 저마자 제가 사는 세상이 있는 법이오. 제각기 소중한 것도 다 다를 것이고. 내 세상에서는 조선도 가족도, 부모님이 주신 이 머리카락도 다 소중하오. 나는 빈관 사장이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내 세상에 최선을 다하고 있소. 허니 내 앞에서 그리 위악 떨지 마시오.
50. 신문사를 차렸다 들었소. 나는 글의 힘은 믿지 않소. 허나 귀하는 믿소. 글도 힘이 있소. 누군가는 기록해야 하오. 애국도 매국도 모두 기록해야 하오. 그대는 총포로 하시오. 내가 기록해주겠소.
51. 전쟁을 해보면 말입니다.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으나, 내어주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어떤 여인도, 어떤 포수도, 지키고자 아둥바둥인 조선이니 빼앗길지언정 내주진 마십시오.
52. 조선은 더 위태로워졌고, 나의 집안은 송두리채 부서졌소. 나의 세상엔 더 이상 헛된 희망도, 더 들킬 낭만도 없소. 난 이제 더는 귀하와 나란히 걸을 수 없소. 허니 이제 그만 각자의 방향으로 멀어집시다.
53. 아랍 속담에 사자 한 마리가 이끄는 양 떼가 양 한 마리가 이끄는 사자 떼를 이긴다는 말이 있다. 조선은 날로 위태로워져가고 있고 한 나라가 흔들릴 때 제일 먼저 타격 입는 것은 바로 군이다. 일본은 조만간 원수부를 장악하고 십중팔구 무관학교부터 폐지하려 들 것이다. 저들은 학도들을 양 떼라 깔보겠지만, 학도들은 이미 훌륭한 지휘관들이다. 그러니 사자가 되어라. 용기가 역사를 이끈다. 용감하게 나아가고 현명하게 후퇴해라. 그것이 학도들의 역사가 될 것이다.
54. 어쩌자는 건지... 난 다시 조선을 달려나가는 중이고, 지금 이 순간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조선이오. 내 마지막 조선이 이리 아름다우면 잊을 방도가 없는데.
55. 이천만 동포여, 두렵고 두려우나 마땅히 나아가자. 천둥으로 폭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