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비 오는 날이었는데, 나의 박해자로부터 성 앞 광장으로 나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나는 광장에 서서 기다리며, 흠뻑 젖은 검은 나무들에서 떨어지는 축축한 마로니에 이파리를 두 발로 헤집고 있었다. 돈은 못 가져갔고, 크로머에게 뭐라도 줘야겠기에 케이크 두 조각을 가져가 들고 있는 참이었다.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그렇게 어딘가 한구석에 서서 오래도록 그 애를 기다리는 데 익숙해진 터였다.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바꿀 도리가 없는 것은 하는 수 없이 접어 두고 받아들이게 마련이듯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침내 크로머가 왔다. 그날 그 애는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 애는 내 가슴팍을 주먹으로 가볍게 몇 대 치고는 웃었고, 케이크를 받고, 심지어 축축한 담배를, 내가 받지는 않았지만 권하기까지 했다. 유별나게 친절했다.
"그래." 그가 떠나면서 말했다. "내가 잊지 않으려고 해 두는 말인데 말이야. 다음번에는 누나를 데려와. 큰누나 쪽으로 말이야. 누나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대답도 못 했다. 그냥 어리둥절해하며 그 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못 알아듣겠어? 네 누나를 데려오라고."
"알아들었어, 크로머. 하지만 그건 안 돼. 나는 그러면 안 돼. 누나도 결코 나하고 오지 않을 거고."
나는 그것 역시 늘 그랬던 것처럼 다만 농간이고 구실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자주 그런 식이었다. 무언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 나를 놀라게 하고, 나에게 굴욕을 주고 그다음에는 서서히 자기와 협상하게 했다. 그러면 나는 약간의 돈이나 다른 선물로 몸값을 주고 빠져나가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 거부했는데도 그 애는 화난 기색도 거의 없었다.
"글쎄." 그 애가 얼버무렸다. "네가 잘 생각해 보겠지. 너네 누나와 알고 지냈으면 한단 말이야. 한 번쯤 알고 지내는 거야 되겠찌. 그냥 누나와 같이 산책하러 가. 그럼 내가 낄 테니까. 내일 휘파람으로 부를게. 그때 다시 한번 그 일에 대해 이야기 하자."
그 애가 떠나고 나서 갑자기 그 애가 원하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나는 아직 완전히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소년들과 소녀들이 조금 나이가 들면 그 어떤 비밀에 찬, 금지된 상스러운 일들을 함께 벌일 수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이제 그러니까 아주 갑자기 그 일이 얼마나 엄청난지가 분명해졌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이 즉시 확고해졌다. 그러나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크로머가 내게 어떻게 복수할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나에게는 새로운 고문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충분히 않았던 것이다.
절망적으로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나는 텅 빈 광장을 건너갔다. 새로운 고통, 새로운 노예 상태였다!
그때 상쾌하고 낮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놀라서 빨리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더니 뒤에서 한 손이 나를 부드럽게 잡았다.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잡힌 척했다.
"형이었구나?" 내가 불안정하게 말했다. "깜짝 놀랐어."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그때보다 더 어른스럽고 압도적이며 꿰뚫어 보는 사람의 시선인 적은 없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고 지낸 터였다.
"그거 유감인데." 그가 특유의 공손하면서도 아주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하지만 들어 봐, 누가 놀라게 한다고 그렇게 놀라서는 안 돼."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지 뭐."
"그런 것 같네. 하지만 알아 둬. 너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두려워 떨면 그 사람은 생각해 보기 시작하는 거야. 이상하게 생각되는 거야. 궁금해지지. 그 사람은 생각하게 돼, 네가 이상하게도 잘 놀란다고. 그러고는 계속 생각하지. 사람이 저러는 건 바로 겁이 날 때라고. 겁쟁이들은 언제나 불안하지. 하지만 내 생각에 너는 원래 겁쟁이가 아니야. 아, 물론 영웅도 아니지. 지금 넌 뭔가 겁나는 일이 있어. 겁나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그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야. 그래. 사람을 무서워해서는 결코 안 돼. 날 무서워하진 않지? 아니면 무섭니?"
"오, 아니야, 전혀 무섭지 않아."
"그럴 테지. 하지만 네가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
"몰라..... 날 내버려 둬, 나한테서 뭘 바라는 거야?"
그는 나와 나란히 걸었고 (나는 더 빨리 걸었다, 도망칠 생각을 하며.) 곁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번 가정해 봐." 그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내가 널 좋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이야. 아무튼 나한테는 겁낼 필요가 없다고. 너하고 실험을 한번 해 보고 싶어. 재미있기도 하고 네가 거기서 꽤 쓸모 있는 걸 배울 수도 있어. 한번 주의해 들어봐! 나는 이따금씩 독심술이라고 부르는 기술을 써보곤 해. 무슨 나쁜 마법이 있는 건 아니야.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면 아주 이상해 보이지. 그걸 사람들을 아주 놀라게 할 수도 있어. 자아, 우리 한번 시험해 보자. 그러니까 내가 너를 좋아하거나 너에게 관심이 있는데 이제 네 마음속 모습이 어떤지를 밝혀 보고 싶은 거야. 그러기 위해 나는 이미 시작했어. 내가 널 놀라게 했지. 넌 그러니까 잘 놀라는 거야. 즉 넌 두려운 일이나 사람이 있는 거야. 그게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 없 어.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내준 데서 비롯해. 예를 들면 뭔가 나쁜 일을 했고 상대방이 그걸 알아. 그럴 때 그가 너를 지배할 힘을 가지는 거야. 알아들었니? 이제 분명하지, 안 그래?"
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진지하고 영리했다. 그러면서도 너그러웠지만, 온갖 정다움이 깃들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엄격했다. 정의나 뭔가 그 비슷한 것이 있었다. 나는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몰랐다. 그는 마술사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이해했니?"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한테 말하는데 말이야. 이건 우스꽝스러워 보여, 독심술 말이야. 그러나 이건 아주 자연스럽게 돼. 예를 들면 언젠가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네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네게 꽤 정확하게 말해 줄 수도 있어. 딴 이야기지만 말이야. 네가 한 번쯤 내 꿈을 꾸었으리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런 건 관두자! 넌 명석한 소년이야, 대부분의 아이들은 참 멍청하지! 나는 때때로 내가 신뢰하는 명석한 소년과는 어디서든 즐겨 이야기해. 괜찮겠지?"
"그럼, 괜찮고말고. 다만 난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어."
우리 한번 즐거운 실험을 계속해 보자! 그러니까 우리가 찾아낸 거야. S라는 소년이 잘 놀란다. 그 애는 누군가를 무서워한다. 필시 그 애와 이 상대방 사이에는 몹시 불편한 비밀이 하나 있다. 대강 맞지?"
꿈속에서처럼 나는 그의 목소리에, 그의 영향력에 굴복했다. 그 목소리는 나 자신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목소리 아니었을까? 모든 것을 아는 목소리 아니었을까? 나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더 명확하게 아는 목소리 아니었을까?
데미안이 내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
"그럼 맞는 거지. 그럴 줄 알았어. 이제 딱 한 가지 질문만 더 할게. 아까 저기서 가 버린 애 이름이 뭔지 아니?"
나는 흠칫했다. 건드려진 나의 비밀이 고통스럽게 내 속에서 다시 움츠러들었다.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누구? 다른 애는 없었어, 나뿐이었지."
그가 웃었다.
"그냥 말해." 그가 웃었다. "그 애 이름이 뭐지?"
내가 조그맣게 말했다. "저 프란츠 크로머 말이야?"
그가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보! 넌 똑똑한 녀석이로구나, 우린 친구가 되겠다. 그런데 네게 해 줄 말이 있어. 그 크로머는 말이야, 아니면 이름이 뭐든 간에, 나쁜 녀석이야. 그 애 얼굴에 자기는 악당이라고 쓰여 있어! 넌 어떻게 생각하니?"
"응, 그래." 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애는 나빠, 사탄이야! 하지만 그 애가 아무것도 알아선 안 돼! 맙소사, 제발, 그 애가 알아선 안 돼! 그 애를 알아? 그 애가 형을 알아?"
"조용히 좀 해! 그 애는 갔어. 그리고 날 몰라. 아직은 모른다고. 하지만 그 애에 대해 알고 싶은걸. 그 애가 공립 학교에 다니니?"
"응."
"몇 학년인데?"
"5학년. 하지만 그 애한테 아무 말 하지 마! 제발, 제발 그 애한테 아무 말 하지 말아 줘!"
"걱정 마, 너에겐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거야. 아마도 넌 그 크로머에 대해 조금 더 들려줄 마음이 없겠지?"
"그럴 수 없어! 안 돼, 나를 내버려 둬!"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그가 말했다. "안됐다. 우리가 이 실험을 좀 더 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널 괴롭히지는 않을게. 그 애를 두려워하는 게 올바르지 않다는 건 너도 알지, 안 그래? 그런 두려움이 우리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거야. 그런 건 떨쳐 버려야만 해. 넌 그 두려움을 떨쳐 버려야만 해. 제대로 된 사내 녀석이 되려면 말이야, 이해하겠니?"
"분명 형이 전적으로 옳아..... 하지만 그렇게 안 되는걸. 형은 몰라......"
"어떤 면에서는 내가 네 생각보다 더 많이 안다는 걸 보았겠지. 너 그 애에게 혹시 돈 빚진 거라도 있니?"
"그래, 그렇기도 해.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야. 난 말할 수 없어. 할 수 없다고!"
"네가 빚진 돈을 내가 갚아 주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니? 내가 너한테 줄 수도 있는데."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부탁이야, 아무에게도 그 얘기 하지 말아 줘! 한마디도! 형은 날 불행하게 해!"
"날 믿어, 싱클레어. 넌 언젠가 너희 사이의 비밀을 나에게 알려 줄 거야."
"결코 그러지 않을 거야, 결코!" 내가 격렬하게 소리쳤다.
"다 너 좋을 대로 해. 난 그냥 어쩌면 네가 나중에 한 번 더 내게 말하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야. 당연히 자발적으로 말이야! 내가 그 크로머처럼 굴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오, 아니야. 하지만 형은 그것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걸."
"전혀 모르지.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뿐이지. 그리고 나는 결코 크로머처럼 굴지 않을 거야. 그건 믿어 줘. 또 넌 나한테는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잖니."
"우리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점차 안정되었다. 그러나 데미안이 사실을 안다는 것이 나에게는 점점 수수께끼 같아졌다.
"이젠 집에 가 봐야겠다."라고 말하며 그가 빛 속에서 자기 외투를 더 단단히 여몄다. "한 가지만은 다시 말해 주고 싶어. 우리가 벌써 이만큼 왔으니까 말이야. 넌 그 녀석을 떨쳐야 할 것 같아! 달리 안 된다면 그 애를 때려죽여! 만약 네가 그렇게 한다면 나도 좋겠어. 내가 널 돕기도 할 거고."
나는 새롭게 겁이 났다. 카인의 이야기가 갑자기 다시 떠올랐다. 나는 무시무시해져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내 주위에 무시무시한 일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럼 좋아." 막스 데미안이 미소 지었다. "집에나 가! 우린 벌써 그 일을 하고 있어. 때려죽이는 편이 가장 간단하겠지만 말이야. 그런 일들에서는 가장 단순한 것이 늘 최선이지. 크로머와 어울리는 건 좋지 않아."
나는 집으로 왔다. 일 년쯤 떠나 있었던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나와 크로머 사이에 미래 같은 무엇, 희망 같은 무엇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나 무섭도록 혼자 여러 주일 동안 내 비밀과 더불어 있었던가를 이제 비로소 알았다. 내가 이따금씩 깊이 했던 생각도 곧바로 떠올랐다. 부모님 앞에서 고해하면 후련하기야 하겠지만 그래 봐야 나를 완전히 구원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 그러나 이제 나는 고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 낯선 사람한테. 그리고 구원의 예감이 짙은 향기처럼 내게로 풍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