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반년쯤 뒤, 나는 그 유혹에 저항할 수 없어 한번은 산책하는 길에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카인이 아벨보다 더 훌륭하다고 설명하는데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아버지는 몹시 놀라며 그것은 새로울 것이 없는 견해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기독교 이전 시대에도 등장했으며 사이비 종파들에게 전수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스스로를 '카인교도'라고 불렀다고. 그러나 물론 이 미친 학설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깨뜨리려는 악마의 시험이라고. 왜냐하면 카인이 옳고 아벨이 옳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 결과는 신이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성서의 신이 올바른 신, 유일신이 아니라 틀린 신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정말로 카인교도들은 비슷한 것을 가르치고 설교하기도 했다고. 그렇지만 이 이교 짓거리는 오래전에 인류로부터 사라졌다고. 그래서 나의 학교 친구가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라고. 아무튼 그런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아버지는 진지하게 경고했다.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내 어린 시절에 대해, 아버지 어머니 곁에서 내가 누렸던 안정감에 대해, 어린아이가 사랑과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환한 환경 속에서 넉넉하게 즐기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아름답고 정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나에게 흥미로운 것은 오직 나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 내가 내디딘 걸음들뿐이다. 그 모든 아리따운 휴식의 지점들, 행복의 섬들과 낙원들의 마력을 나도 모르지 않지만, 그 모든 것을 나는 먼 곳의 광채에 싸인 채 두고자 한다. 그곳에 다시 한번 발 디딜 욕심은 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아직 내 소년 시절에 머무르는 동안 더할 이야기는 오직 어떤 새로운 것이 나에게 닥쳤는지, 무엇이 나를 앞으로 몰아갔는지, 나를 찢어 냈는지 하는 것에 대한 것뿐이다.
이런 충격들은 늘 '다른 세계'로부터 왔고 늘 두려움과 강압과 양심의 가책을 수반했다. 그것들은 늘 혁명적이었다. 내가 그 안에 그대로 머물고 싶던 평화를 위협했다.
허용된 밝은 세계에서는 숨기고 은폐해야 하는 하나의 원시적 충동이 나 자신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해야만 하는 시절이 왔다. 어떤 사람에게나 그러듯이 천천히 눈 뜨는 성에 대한 감정이 나에게도 하나의 적이자 파괴자로, 금기로, 유혹과 죄악으로 들이닥쳤다. 나의 호기심이 찾은 것, 꿈과 기쁨과 두려움이 내게 가져다준 것, 사춘기의 큰 비밀, 그것은 내 유년의 평화에 감싸인 행복감에는 맞지 않았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이제 더는 어린아이가 아닌 아이의 이중생활을 영위했다. 내 의식은 집 안의 허용된 세계 속에 살았으며 어렴풋이 솟아오르는 새로운 세계는 부정했다. 그 위에서 저 의식적 삶이 만드는 다리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내 속에서 유년의 세계가 붕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부모들처럼 우리 부모님도 말없이 덮어 두며 눈뜨는 생명의 충동을 모르는 척했다. 그들은 다만 다함없는 세심한 배려를 기울여, 현실을 부인하며 점점 더 비현실적이고 위선적이 되어 가는 어린이의 세계에 좀 더 머무르려는 나의 절망적인 시도들을 도와주었을 뿐이다. 부모라는 존재가 이 점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니 내 부모님을 비난하지는 않겠다. 자신을 다스리고, 나의 길을 찾아내는 것은 나 자신의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유복하게 자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듯이 자신의 일을 잘 해내지 못했다.
누구나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인생의 분기점이다. 자기 삶의 요구가 가장 혹심하게 주변 세계와 갈등에 빠지는 시점, 앞을 향하는 길이 가장 혹독한 투쟁으로 쟁취되어야 하는 지점이다. 많은 사람이 우리의 운명인 이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경험한다. 삶에서 오로지 한 번, 유년이 삭아 가며 서서히 와해될 때, 우리의 사랑을 얻었던 모든 것이 우리를 떠나가려 하고 우리가 갑자기 고독과 우주의 치명적인 추위에 에워싸여 있음을 느낄 때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이 영원히 이 절벽에 매달려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것에, 잃어버린 낙원의 꿈에, 모든 꿈 중에서 가장 나쁘고 가장 살인적인 그 꿈에 한평생 고통스럽게 들러붙는다.
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내 유년의 끝이 왔음을 알리던 느낌들, 꿈의 영상들은 이야깃거리가 될 만큼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두운 세계', '다른 세계'가 다시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 한때 프란츠 크로머였던 것이 이제는 나 자신 속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다른 세계'가 바깥에서부터도 나를 지배하는 힘을 다시 얻었다.
크로머와의 일이 있은 지 몇 년이 지나고였다. 내 삶의 저극적이고 죄에 찬 시절이 몹시도 멀리 있고 짧은 악몽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때였다. 프란츠 크로머는 오래전부터 내 삶에서 사라져 어쩌다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내 쪽에서 거의 신경 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내 비극의 다른 중요한 등장인물 막스 데미안은 그때까지도 아직 나의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눈에 보이게, 그러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으면서 오랫동안 멀리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던 그다 비로소 다시 서서히 가까이 다가섰고, 다시 힘과 영향력을 발산했다.
그 시절의 데미안에 대해 내가 무엇을 아는지 떠올려 본다.. 일 년 남짓 그와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쪽에서 그를 피했고, 그는 결코 재촉하지 않았다. 언젠가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다음에는 이따금씩 그의 다정함에 냉소와 묘한 비난의 섬세한 울림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 상상이었을 수도 있다. 내가 그와 함께 겪은 사건이며 그가 당시 나에게 행사한 기이한 영향력은 그나 나나 모두 잊은 듯했다.
나는 그의 모습을 생각해 내려 한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를 떠올려 보니, 그럼에도 그는 거기 있었고 내가 그의 존재에 주목했음을 알겠다. 그가 학교에 가는 모습이 보인다. 혼자 아니면 키 큰 학생들 사이에 있는 모습이, 자신의 공기에 에워싸여 자신의 법칙들 아래 살면서 낯설게, 외롭고 고요하게, 그들 사이에서 성좌처럼 거니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와 친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그의 어머니 빼고는. 그런데 어머니와도 그는 어린아이처럼이 아니라 성인처럼 교류하는 듯 보였다. 선생님들은 그를 될 수 있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는 좋은 학생이었지만 누구의 마음에도 들려고 하지 않았다. 이따금 그가 어느 선생님에게 어떤 말을 하거나 주석을 달거나 항변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것들은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로운 도전이요, 비꼼이었다.
두 눈을 감고 떠올려 본다.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곳이 어디였던가? 그렇다, 이제 다시 그곳이었다. 우리 집 앞 골목이었다. 그곳에서 하루는 그가 손에 수첩을 들고 서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우리 집 현관문 위의, 새가 있는 오래된 문장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창가에 서서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그를 바라보았다. 문장을 향한 그의 주의 깊고 서늘하고 환한 얼굴을 몹시 놀라워하며 바라보았다. 그것은 어른의 얼굴, 연구가 혹은 예술가의 얼굴, 뛰어나고 의지로 가득하며, 이상하게도 환하고 서늘한, 무엇을 아는 두 눈을 지닌 얼굴이었다.